도희윤 행복한통일로 대표/을지대 겸임교수 

 

1980년대 한국의 대학가에서는 소위 사상투쟁의 치열함 속에 각자 소속된 정파의 대표적인 운동권 가요가 있었다. 예를 들자면 요즘 국가보훈처와 5.18 유족 간에 신경전을 벌였던 ‘님을 위한 행진곡’은 모든 정파를 떠나 즐겨 부르던 노래였고, 주체사상파로 통칭되는 NL(민족해방)파는 ‘반전 반핵가’를 언제나 선창했고, 또 다른 정파 중 하나였던 CA(제헌의회)파는 민족민주혁명가로 변형된 ‘적기가(赤旗歌)’를 불렀었다. 

여기서 ‘赤旗歌’는 당시 일제치하 독립운동가들이 즐겨 불렀다는 의미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학생들 사이에서 열창되곤 했는데, 그 역사적 유래는 정확히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이 노래가 북한에서의 대표적인 혁명가요로 불렸던 것만은 사실이다. 북파공작원들의 사연을 영화화한 ‘실미도’라는 작품에서 배우 임원희가 섬지역의 여교사를 겁탈했다는 죄목으로 백사장 한가운데 묶인 채로 형벌을 받을 때, ‘인민의 기, 붉은 기는 전사의 피로 얼룩져…’라고 외치면서 동료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장면을 기억하는 독자분들도 있을 것이다. 바로 이 가사가 적기가 중의 일부이다.

그래서 적기가는 북파공작원들에게도 꼭 기억해야만 하는 노래였고, 북한의 세습독재세력에 충성을 다하는 혁명전위들에게는 언제나 가슴에 담고 목숨으로 담보해야하는 노래였지만, 1970년 이후 김씨 왕조에 대한 본격적인 우상화작업이 진행되면서 모든 혁명가요는 김일성 왕조를 위한 용비어천가로 변모해갔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일본에서의 공산주의 역사는 우리보다 훨씬 길며 뿌리 또한 깊었다. 지금도 합법적인 공산당이 존재한다. 물론 북한식 공산주의 정당은 아니지만 소수정당으로 명맥만 유지되고 있는데, 일본공산당의 당 기관지 이름이 ‘아카하다(赤旗)’, 적기이다. 즉 공산주의와 인민의 열정을 뜻하는 붉은 깃발을 의미하는 것이다.

1972년 일본공산당은 ‘아카하다(赤旗)’의 기자를 평양에 상주하는 특파원으로 파견하는데, 당시 파견된 특파원이 바로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익숙한 ‘하기와라 료’라는 사람이다. 노무현 정권 당시 대한항공(KAL) 858기 테러의 주범이었던 김현희씨의 가짜몰이로 어수선할 즈음, 하기와라 료 기자는 1972년 평양의 헬기 착륙장에서 찍었던 사진 몇 장을 공개했는데, 당시 꽃을 든 어린 소녀가 김현희였다는 것이 밝혀지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 분이기도 하다. 지금은 팔순을 바라보는 연로한 나이지만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왕성한 활동 중의 하나가 바로 북한의 솔제니친 작가 반디 선생의 고발소설집을 일본판으로 번역, 출판하는 것이었는데, 번역작업 도중 지병인 위암이 악화돼 견디기 힘든 큰 수술을 진행했음에도 그의 집념을 꺾을 수 없었고, 급기야 며칠 전에 프랑스판에 이어 두 번째 해외 번역본으로 일본판을 출간하게 됐다.

앞서 1980년대 한국의 운동권 이야기를 꺼내면서 ‘적기가’를 언급한 것은, 뼛속까지 붉은, 소위 골수 빨갱이였던 일본공산당 기관지 편집장이 북한 내부 최초의 반체제소설의 번역을 맡았다는 것의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함이었다.

하기와라 료씨는 1972년 당시 평양에 파견되면서 북한식 공산주의에 대한 환멸을 느끼는 데 불과 3개월도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상대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고, 끊임없이 싸워야 할 적을 생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악한 악의 세상 북한에서, 적기(赤旗)는 반디 선생의 마지막 단편인 ‘빨간 버섯’을 통해 절규했던 한 마디로 그의 운명을 보여준다.

“저 빨간 버섯, 저 독버섯을 뽑아버려라. 이 땅에서 아니, 지구 위에서 영영!”